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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벽수행 생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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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은 무섭다. 하루아침에 새까매진다. 가로등 아래서 살점처럼 시뻘겠는데.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보다 무섭다. 유리컵 속에 가둔 말벌이 죽지는 않고 죽어만 간다. 잠그지 않은 가스밸브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내가 무섭다. 아무도 없어서 무섭고 누군가 있을까 봐 더 무섭다. 엄마한테 할 말 없니 엄마의 그 말이 내 말문을 닫는다. 할 말이 없어서 무섭고 할 말이 생길까 봐 더 무섭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때와 같이 무서워하던 것들이 시원하게 풀려나간다. 눈물도 안 나던 순간에 눈물이 갑자기 끝나는 순간에 무섭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에 한 번도 믿어보질 못해서 쉽게 믿어버릴까 봐서 술 취한 친구의 눈빛과 술 안 취한 친구의 눈빛과 그래서 그랬다는 말과 아빠의 검지가 무섭다. 한 마디만 남아서 손톱..
알 수 없지 가득 찬 허기란 게 얼마나 묵직한지 한때는 액체들의 이동수단 흐르는 키스들의 보관함이었지 입술을 통과해야 도착하는 키스들 다섯갈래로 흩어지는 적요가 몸을 감싸고 공기와 먼지, 그늘이 쌓이면 빈방을 채우는 무음들 시간은 바깥에서 미끄러진다 깨지지 못한 자의 비애랄까 제대로 죽기 전, 죽음에도 실패한 당혹 이 빠진 그릇이란 끝내 아무것도 적시지 못하는 자의 얼굴, 얼굴 위를 기어가는 금[線] 죽기 일주일 전 당신은 이가 네개 부러졌다고 했지 나는 모르는 척했지만 일주일을 더 살다 당신이 아주, 갔을 때 한동안 아무것도 아무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 밤의 형태를 기억하고 있었어 기억과 생동 한낮에 생각하면 나는 어두운 기억을 착각한 적이 없는 것 같아 작은 어둠의 미래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해 하얀 돌계단을 지나 계단의 하얀 돌에 머무르는 것 돌에 묻은 슬픔을 안개에 씻고 싶어서 정말 그렇게 하는 것 오래전 정해진 기억이 생동하고 구름도 구름이 되기 위해 애를 쓸 때 이번에 아버지가 아니고 이번에 어머니가 아닌 것 오해와 비밀 가만히 떠올려보면 나는 투명한 기억을 잊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오랜 노인처럼 단번에 흘러드는 기억을 잊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아주 천천히 풀리는 오해들 두 눈을 감고 기억하는 비밀 형태들 두 눈을 감고 기억하는 것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어느덧 모레와 글피와 그글피 비밀이 아직 비밀일 때 순간의..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병들어 있는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하늘 가운데서 떨어진 바람이 돌덩이로 굳어 당신을 흉내냈어 예전부터 당신은 거기 있었지만, 그러나 그 첫 대면 이후 당신은 사라졌지 당신이 된 바람, 돌덩이가 된 당신의 모방자, 당신이 과거는 나의 미래야 지워져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기에 신비로운 혼돈, 움직이지 않는 가면의 당신이지만 상상 속에서 나는 당신과 사랑을 나누지 한편의 집약된 정물의 내용물 속을 헤집으며, 내 스스로 아름다운 전설과 복음을 전파하며⋯⋯ 당신은 나의 시선 속에 지워지고 그 악덕한 시선이 만들어낸 당신의 환영 안에서 나는 나를 새롭게 만들지 내가 만든 당신의 가면과 이유 없이 전락하여 가면이 된 바람 한 줄기, 모든 죄들을 완성하면 그건 더없는 용서가 되겠지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