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당신을 만난 이후로」
면벽수행 생존 일기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병들어 있는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하늘 가운데서 떨어진 바람이 돌덩이로 굳어 당신을 흉내냈어 예전부터 당신은 거기 있었지만, 그러나 그 첫 대면 이후 당신은 사라졌지 당신이 된 바람, 돌덩이가 된 당신의 모방자, 당신이 과거는 나의 미래야 지워져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기에 신비로운 혼돈, 움직이지 않는 가면의 당신이지만 상상 속에서 나는 당신과 사랑을 나누지 한편의 집약된 정물의 내용물 속을 헤집으며, 내 스스로 아름다운 전설과 복음을 전파하며⋯⋯ 당신은 나의 시선 속에 지워지고 그 악덕한 시선이 만들어낸 당신의 환영 안에서 나는 나를 새롭게 만들지 내가 만든 당신의 가면과 이유 없이 전락하여 가면이 된 바람 한 줄기, 모든 죄들을 완성하면 그건 더없는 용서가 되겠지 병들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나, 완전한 죽음은 병 근처엔 다가오지 않아 치료받지 않으며 나는 모든 사소한 죽음들을 수락할 테야

 

당신의 용서는 내 핏줄 속에 숨은 바람을 뽑아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것, 살아서 죽음을 보여 주는 것,

 

죽음을 살아낼 테야